**Geopolitical Futures (2026년 2월 9일)**
**Hilal Khashan, 「US-Kurdish Relations: From ‘Betrayal’ to Disillusion」**
시리아에서의 전환점
지난달 미국의 시리아 특사 톰 배럭(Tom Barrack)은 이슬람국가(IS)에 맞선 주력 전투 세력으로서 쿠르드 주도의 시리아민주군(SDF)의 역할은 사실상 종료되었다고 밝혔다. 이 발언은 다마스쿠스의 과도정부와 시리아 북동부의 쿠르드 지도부가 수주간의 무력 충돌 끝에 쿠르드 다수 지역의 지위에 대해 합의에 도달했다고 발표한 직후 나왔다.
배럭의 발언은 IS 격퇴를 위한 국제 연합과의 협력 때문에 10년 이상 쿠르드 세력을 무기, 훈련, 정보, 자금으로 지원해온 미국의 기존 정책을 뒤집는 것이었다.
배럭은 미국이 시리아에 장기 주둔할 의사가 없으며, 우선 과제는 IS 잔존 세력 격퇴, 화해 지원, 시리아의 국가적 통합 강화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쿠르드가 시민권 보장, 문화적 보호, 정치 참여가 보장된 통합 시리아 국가로 완전히 편입될 기회를 맞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조건들은 아흐메드 알샤라아 시리아 대통령이 통합 합의의 일부로 약속한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배신’이라는 쿠르드의 인식
그러나 지역 전반의 쿠르드인들은 미국이 자신들을 배신했다며, 더 이상 워싱턴을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나 소수민족 권리의 수호자로 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미국이 특히 이라크에서 중앙정부에 맞서 쿠르드 봉기를 부추긴 뒤, 더 큰 목표를 달성하면 쿠르드를 버려온 전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2015년 IS가 쿠르드 지역을 점령할 듯 보이던 시점에 SDF와 동맹을 맺을 당시, 미국이 쿠르드를 속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시리아 쿠르드 지도부는 애초부터 이 동맹이 전략적이 아니라 전술적 성격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협력의 기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절 미국은 민족자결 원칙을 지지했으며, 이는 쿠르드 민족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미국은 독립 쿠르드 국가 구상을 공식적으로 지지한 적은 없었다. 1923년 로잔조약은 쿠르드 자결권을 언급하지 않았고, 1920년 세브르조약이 오늘날 터키 영토에 자치 쿠르드 지역을 약속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1927년 터키 남동부의 쿠르드인들은 앙카라 정부에 반기를 들고 아라라트 공화국을 선포했지만, 1931년 터키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많은 주민이 시리아 북동부로 피신했다. 1945년에는 소련군이 이란 북서부에 주둔한 틈을 타 이란 쿠르드가 마하바드 공화국을 수립했으나, 1946년 소련 철수 후 이란군의 공격으로 붕괴됐다.
냉전기 미국의 쿠르드 활용
1958년 바그다드에서 쿠데타로 압둘 카림 카심 대령이 집권하자, 미국은 그가 소련과 이념적으로 연계돼 있다고 우려해 쿠르드 봉기를 지원했다. 그러나 1963년 케네디 행정부는 카심이 사실상 이라크 민족주의자라는 점을 인식한 뒤 그를 전복하는 쿠데타를 지지했다.
1968년 사담 후세인이 집권하며 이라크가 소련 쪽으로 기울자, 미국은 이란의 샤(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와 협력해 이라크를 불안정화할 목적으로 쿠르드를 무장·지원했다. 1970년대에도 미국은 쿠르드 국가 수립이 아니라 이라크 내 혼란 조성을 목표로 지원을 재개했다.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에 따르면 1974년의 군사 지원은 쿠르드 승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그다드 정부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1년 뒤 포드 행정부가 이란 샤와 사담 후세인 간 협정을 중재해 이란에 샤트알아랍 수로의 항행권을 부여하면서 명확해졌다.
반복된 좌절의 기억
1988년 사담 후세인의 할라브자 화학 공격으로 8,000명 이상의 쿠르드인이 사망했을 때, 레이건 행정부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지 않았다. 1991년 걸프전 후 조지 H.W.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국민에게 봉기를 촉구했으나, 남부의 시아파와 북부의 쿠르드 봉기가 일어났을 때 사실상 방치했다. 다만 터키와 이란의 압박 속에서 북이라크에 쿠르드 국가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했고, 이는 1990년대 후반 쿠르드 자치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쿠르드 페쉬메르가는 이를 지원했고, 미국은 보답으로 쿠르드를 새 이라크 헌법에 포함시키고 잘랄 탈라바니를 사담 축출 이후 첫 이라크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2014년 IS가 모술을 장악하면서 전략 환경은 급변했다. 2014~2017년 쿠르드 자치정부(KRG)는 IS 격퇴의 핵심 파트너가 되었고, 이 시기는 미–쿠르드 협력이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
같은 해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 도시 코바니가 IS에 거의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SDF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동맹은 어디까지나 실용적·전술적 관계였다. 2017년 미 국무부는 쿠르드 지도부에 이 동맹이 임시적 성격임을 분명히 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SDF는 시리아 북·동부의 광범위한 지역과 전략적 유전을 장악하고 지방 행정을 구축했으며, 막대한 미 공군 지원 아래 IS를 격퇴했다. 그러나 2024년 12월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 붕괴와 알샤라아 집권 이후, 미국은 SDF와의 동맹을 종료하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중동 질서와 정책 변화
미국은 알샤라아의 통치 성과에 만족을 표했으며, 특히 그가 안보 협정 체결과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 의지를 밝힌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동 재편 과정에서 시리아 분열을 유지할 실익이 없다고 보고 있다. 과거 미–시리아 쿠르드 밀착은 미–아사드 관계 악화의 산물이었으며, 이란과 결별하고 IS가 제거된 새로운 질서 속에서 미국은 더 이상 쿠르드와의 동맹을 필요로 하지 않고 다마스쿠스의 새 정부와 관계 개선을 택하고 있다.
쿠르드의 좌절과 환멸
SDF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트럼프 행정부의 새로운 국가안보 전략과 분리해 볼 수 없다. 이 전략은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보다 경제적 이익과 에너지 안보를 우선시한다.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에 대해서도 미국은 바그다드와 اربيل(Irbil)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광범위한 전략 목표에 부합할 때만 쿠르드를 지원해왔을 뿐 완전한 독립을 지지한 적은 없다.
또한 미국과 터키의 전략적 관계는 SDF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제약해왔다. 터키가 테러 조직으로 지정한 PKK의 시리아 분파에서 SDF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2018년 터키는 ‘올리브 가지 작전’을 통해 코바니–아프린 국경 연결을 차단했고, 2019년에는 ‘평화의 샘 작전’으로 완충지대를 구축했다. 그 결과 터키는 러시아와 이란을 외교로 관리하고, 미국이 지원한 쿠르드 프로젝트를 군사·정치적으로 무력화했다.
이란에서는 쿠르드 엘리트와 대중 모두 정권 교체에 소극적이며, 시리아 SDF의 몰락을 중동에서 소수민족에 대한 미국 지원 철회의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쿠르드인들은 오래전부터 “우리의 친구는 산뿐”이라고 말해왔다. 그들을 지지하던 국가들은 언제나 자기 목적을 달성하면 등을 돌렸다는 것이다. 시리아군이 과거 SDF 통제 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것도 그들에게는 돌발 사태가 아니라, 배신으로 점철된 오랜 역사 속 또 하나의 장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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