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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세메모

시리아와 레바논 사이에 지속되는 균열

Geopolitical Futures /  2025년 12월 18일 /
**Hilal Khashan, 〈The Enduring Wedge Between Syria and Lebanon〉**


 

미국의 시리아·레바논 특사 톰 배럭(Tom Barrack)은 중동과 미국 정치권 모두를 자주 자극해 온 이단적(maverick) 외교관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중동 국가들은 군주제가 가장 적합한 통치 형태라는 주장, 이스라엘은 민주국가가 아니라는 발언, 그리고 1916년 영국과 프랑스가 체결한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이 지역의 사회·문화적 생태를 훼손하고 이라크와 대(大)시리아 지역에 인위적이고 기반 없는 국가들을 만들어냈다는 주장 등을 펼쳐 왔다.

이달 초 그는 레바논을 “실패 국가”로 규정하며, 공통된 문화적·정치적 배경을 이유로 시리아와 레바논이 하나의 국가로 합병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야심찬 제안은 현실과는 괴리가 커 보인다.


지속되는 갈등 (Enduring Friction)

시리아에서는 1920년 프랑스가 시리아 영토에서 대(大)레바논(Greater Lebanon)을 분리·형성한 데 대해 여전히 분노가 남아 있다. 고(故) 하페즈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시리아인과 레바논인은 “두 개의 국가에 속한 하나의 민족”이라고 말하곤 했으며, 이 인식을 바탕으로 레바논 정부와의 관계를 설계했다. 그는 레바논을 스스로 통치할 수 없는 국가로 보았고, 시리아가 레바논의 내정과 외교를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을 암묵적으로 드러냈다.

레바논과 시리아의 관계는 1940년대 독립 이후 지속적으로 긴장 상태에 놓여 왔다. 형제적 유대의 깊이를 과장하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지만, 이는 양국 사이에 깔린 심각한 갈등과 상호 불신을 가리지 못했다. 본질적으로 시리아인들은 레바논의 독립을 항상 거부해 왔으며, 레바논을 자국 민족의 일부로 여겨 왔다.

하페즈 아사드가 1971년 시리아 대통령이 되자 그는 레바논 정치에 대한 지배를 추구했고, 1975년 레바논 내전 발발 이후 그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2005년 라피크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 암살 이후 시리아에 대한 국제적 압박이 거세지면서, 시리아군은 사실상 레바논을 비공식적으로 식민지화한 지 30년 만에 철수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6년 뒤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한 국가에서 발생한 사건이 다른 국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가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내전 이후 시리아 난민들이 대거 레바논으로 유입되었고, 레바논의 수니파는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에 대한 봉기를 지지했다. 헤즈볼라는 아사드를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한다고 발표했다.


계속되는 현안들

아사드 왕조는 1년 전에 붕괴되었지만, 양국 간 긴장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레바논에게는 시리아 난민의 귀환과 국경 획정 문제가 최우선 과제인 반면, 다마스쿠스는 재판 없이 비인도적 환경에서 수감 중인 시리아인 수감자들의 송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헤즈볼라의 반대에 직면한 레바논 정부는 반(反)아사드 봉기를 지지했던 시리아인 및 레바논인 수감자 약 2,000명을 석방하라는 다마스쿠스의 요구를 거부했다. 레바논 정부는 사법 절차가 느리다는 이유로 이들을 재판 없이 계속 구금하고 있다.

실제로 장기 재판 지연과 과도한 미결 구금은 레바논 사법 체계의 심각한 문제다. 많은 경우 재판 기간이 최종 선고 형량을 초과하며, 수년간 재판을 받다가 결국 무죄로 풀려나는 사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감자 문제는 국경 획정보다 상대적으로 해결이 쉬운 사안이다.


모호한 국경과 구조적 문제

레바논과 시리아 사이의 불명확한 국경은 물자 밀수, 불법 월경, 마약과 무기 밀매를 초래해 왔다. 또한 시리아인과 레바논인이 서로 상대국으로 무단 정착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레바논인들은 시리아 국경 인근 마을 23곳과 농장 12곳을 점유하고 있으며, 현재 최소 36개 지역이 분쟁 상태에 놓여 있다.

시리아 내전 기간 동안, 레바논 신분증을 소지한 이 지역 주민들은 치안 부재와 통제되지 않은 국경 덕분에 양국 간 자유로운 이동을 누렸다. 그러나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에도 밀수는 계속되었고, 이는 국경 충돌로 이어졌다.

누가 다마스쿠스를 통치하든, 시리아는 레바논을 자국 영토의 일부로 간주해 왔기 때문에 국경 획정에 진지한 관심을 보인 적이 없다. 시리아는 1994년에야 마지못해 레바논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며, 시리아 관리들은 여전히 레바논 측을 경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새로운 다마스쿠스 정권은 집권한 지 1년이 넘도록 베이루트에 대사를 파견하지 않고 있다.


시리아 난민 문제

2011년 아사드의 억압적 정책에 대한 봉기가 시작되자 많은 시리아인들이 레바논으로 피신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레바논에 정착한 시리아인은 150만~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는 인구가 500만 명을 넘지 않는 국가로서는 매우 심각한 규모다.

임시 시리아 대통령 아흐마드 알샤라(Ahmed al-Sharaa) 정부는 장기 내전으로 경제가 붕괴되고 난민들의 주거지가 대부분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귀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고 있다. 반면 레바논 정부는 대규모 시리아인 거주를 중대한 안보·정치적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다마스쿠스 역시 이에 반대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시리아 (Syria Today)

60년 이상 시리아를 통치한 아사드 가문은 시민사회를 파괴하고 정치적 다원성을 금지했다. 정치적 표현을 억압하고, 민족·종교 집단들의 참여 요구를 침묵시켰다. 아사드 정권은 알라위 소수파를 활용해 안보 체계를 장악했고, 이는 국민이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반면 레바논 국민은 아랍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수준의 표현의 자유를 누려 왔다.

바샤르 아사드가 2024년 12월 축출된 이후, 알라위파는 자신들을 상대로 한 심각한 학대에 점점 더 불안을 느끼고 있다. 이들은 연방제 도입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으며, 필요하다면 봉기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시리아 서부에서 알라위파를 대상으로 한 폭력은, 구 정권과 협력했다는 이유로 기독교인들까지 겨냥했다. 알샤라는 미국의 민감성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명목상 자신의 지휘 하에 있는 군대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현지 관측통들에 따르면, 아사드의 측근 일부가 알라위 민병대를 조직하고 있으며 시리아 국가 자체가 붕괴 직전에 있다고 믿고 있다. 지난 3월 알라위파 학살 이후, 유력 알라위 지도자들은 시리아 드루즈족을 보호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보호를 요청하기도 했다.


분열의 위기

시리아는 영토 분열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쿠르드족은 이미 국가의 25%를 장악하고 있으며 중앙정부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남서부 드루즈 지역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드루즈족 일부는 자치권을, 일부는 독립 국가 수립을 요구하고 있다. 시리아 해안의 알라위파 역시 불안정한 상태이며, 독립을 목표로 한 무장 봉기를 준비 중이라는 보고도 있다. 이질적인 시리아 사회를 지탱하던 취약한 사회적 결속은 회복 불가능해 보인다.

지난달 알샤라의 워싱턴 방문 이후, 시리아는 국제 대(對)이슬람국가(IS) 연합에 합류했다. 이후 시리아 중부에서 미군과 공동 안보 작전을 수행해 왔으나, 지난주 팔미라 인근에서 IS 연계 세력의 공격으로 미군 3명이 사망했다. 이는 IS가 여전히 시리아의 안정과 국가 재통합을 위협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현실과 동떨어진 구상 (Out of Touch)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시리아가 레바논과 합병될 수 있다는 톰 배럭의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 프랑스는 과거 영국의 압력 속에서 시리아와 레바논 모두에 독립을 부여했다. 이후 시리아는 민주적 의회제를 채택한 반면, 레바논은 종파 간 타협과 합의를 기반으로 한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

레바논의 정치 엘리트들은 무슬림 다수의 시리아와의 통합도, 기독교인들이 선호했던 프랑스 위임통치의 지속도 거부하는 체제를 선택했다. 그 결과 종파 권력 분점, 엘리트의 국가 자원 독점, 깊숙이 뿌리내린 외세 개입이라는 모순적 구조가 형성되었고, 이는 종파 간 긴장을 더욱 악화시켰다.

100년이 넘게 분리된 두 국가를 오늘날 다시 통합하자는 발상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레바논 국민은 오랫동안 정체성 문제로 분열돼 왔지만, 최근 들어 그 강도는 완화되었다. 수니파는 과거(1958~1961년 시리아–이집트 연합 시기) 시리아와의 재통합을 염원했으나, 내전 이후에는 레바논을 자신들의 국가적 열망의 구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시아파는 레바논에 대한 소속감과 이란 혁명에 대한 동일시 사이에서 갈라져 있었지만, 범(汎)시리아 국가에 편입되기를 바라는 경우는 드물었다.

따라서 두 나라가 하나로 합쳐질 가능성은 극히 낮다. 1950년대에 존재했던 통합의 동기는 이미 사라졌다. 양국은 정치·문화·경제적으로 뚜렷이 구별되는 두 국민으로 발전해 왔다. 지난 40년간 헤즈볼라는 ‘새로운 레바논’ 재건의 가장 큰 장애물로 인식돼 왔지만, 지난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불가피한 무장 해제가 이루어지면 레바논은 정치·경제 회복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또한 레바논의 생활 수준은 시리아를 크게 상회한다. 표현의 자유와 서구식 교육 제도 역시 아랍 지역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분열되어 있더라도 레바논 국민은 통합 제안을 계속해서 거부할 것이다.

 

20251219_the-enduring-wedge-between-syria-and-lebanon-geopoliticalfutures-com.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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